2016/08/24 22:36
제도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 가운데 그나마 내가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하나같이 ‘같지 않은' 사람들이다. 기자 같지 않은 기자, 교수 같지 않은 교수, 정치인 같지 않은 정치인, 관료 같지 않은 관료, 목사 같지 않은 목사 등등. 체제가 제공한 껍질로 인해 본디 냄새와 색깔이 짓무르지 않는, 그래서 드물게 기자인 교수인 정치인인 관료인 목사인 사람들.
2016/08/24 22:36 2016/08/24 22:36
2016/08/24 14:17
호칭과 존칭의 변화는 사회상을 반영하는데, 근래 인상적인 사례는 기자에 관한 것이다. 사회적 차원에선 기레기라는 호칭이 일반화한 반면, 사적 차원에선 기자님이라는 호칭이 일반화했다. 물론 기자를 직접 대면할 때 그 호칭은 큰 문제가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기자를 일컬을 때, 즉 3인칭일 때는 압존법에도 어긋나고 과한 것이다. 기자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늘었지만, 기자의 권력에 기대려는 심리 역시 늘었다는 이야기. 이중적이지 않고는 살기 어려운 비루한 시절이다.
2016/08/24 14:17 2016/08/24 14:17
2016/08/23 16:23
글을 되도록 쉽게 써야 한다는 생각은 근대적 교의에 입각한 것이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전근대성을 고려할 때 여전히 유효한 교의다. 그러나 어려울 수밖에 없는 글도 있다. 이를테면 주디스 버틀러 같은 사람은 쉬운 글은 기성 질서의 언어라는 뜻이며 새로운 질서의 언어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치에 맞는 말이다. 그러나 새로운 질서의 언어 역시 다시 쉽게 풀어 쓰는 건 가능하다. 불가능하다면 실제 현실 변화와 유리된 소수의 지적 유희에 머물게 되니, 새로운 질서의 언어는 아니다. 결국 우리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글을 되도록 쉽게 쓰려고 노력하되, 어려울 수밖에 없는 글도 있음을 인정하면 된다. 정작 문제는 새로운 질서의 언어를 담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괜스레 어렵게 쓰는 경우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경멸의 의미에서 ‘기지촌 지식인’이라 불러왔다. 그런데 며칠 전 친구가 말하길 ‘그들은 용기가 없는 것’이라 했다. 맞는 말이다. 그들은 제 글에 지적 고유성이 없다는 사실이 폭로될까 두렵고, 제 글이 실제 현실과 연루되어 안온한 일상에 지장이 생길까 두렵다. 그들은 두려움에 맞설 용기가 없어 어렵게 쓴다.
2016/08/23 16:23 2016/08/23 16:23
2016/08/20 17:13
'감히’는 가장 분명한 죽음의 표식이다. ‘감히 나한테’라고 말하는 건, 내 영혼은 이미 죽었고 사회적 지위나 권력, 명성, 나이 따위 껍질로 연명하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존중하는 사람에게 그 말을 붙이는 건, 그를 박제로 만드는 일이다. 감히 안중근에게! 감히 전태일에게! 생각해보라. 안중근이나 전태일이 저간의 정황을 안다면 ‘감히 나한테!’ 역정을 냈을까, 이해한다는 얼굴로 허허 웃었을까.
2016/08/20 17:13 2016/08/20 17:13
2016/08/19 17:22
두어달 전, 한겨레21 쪽에서 '기사 제휴' 제의가 있었다. 고래를 더 널리 알리고 고래를 구독하지 않는 아이들이 고래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흔쾌히 응했다. 실무 준비를 거쳐 이번 호 한겨레21에 고래가그랬어 섹션이 생겼다. 주로 '고래토론'과 '아삭아삭 민주주의학교' 기사가 격주로 실릴 예정이다. 한겨레21 독자에겐 '아이와 함께 읽는 면'이 생긴 셈이다. 안수찬 편집장은 '별사탕'이라 표현했다. 아이와 함께 읽으면 자연스레 아이의 질문을 받게 된다. 그에 열심히 응하고 토론하는(부디 가르치려 들진 마시고) 각별한 즐거움(얼마간의 진땀을 수반하는)을 누리시길 빈다. 기사 제휴에 동의해주신 필자들과 어린이 토론자들께 감사드린다.




2016/08/19 17:22 2016/08/19 17:22